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[참여정부]]의 후반 ~ 말기[* [[2006년]] ~ [[2008년]].]는 부동산 정책 실책과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([[레임덕]]) 등으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. 한나라당에서는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, 임기 4년 차에는 대통령 지지율이 10%대까지 하락하기도 했었다.[* 다만 대통령 선거가 있던 임기 5년 차에는 지지율이 다시 반등하여 20% 중후반대를 기록하면서 임기를 마감했다. 집권 마지막(2008년)분기 지지율이 27%였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퇴임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. 김영삼(6%), 김대중(24%), 이명박(23%), 박근혜(5%) 그런데 나중에 새누리당은 27%를 2.7%라고 가운데에다가 점을 찍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었다가 [[조경태]] 등의 당내 친노 의원들에게 반발을 사고 해당 논평을 폐기한 뒤 해당 당직자는 제명되었다고 한다.]([[http://www.gallup.co.kr/social/social-public.asp|갤럽 조사 결과 링크]])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다 여권에 대한 실망감까지 더해져 [[열린우리당]]은 제17대 총선 이후 치러진 재보궐선거와 [[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]]를 포함한 모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과반 의석이 붕괴되었다. 망조를 느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개혁파인 [[임종인]], [[천정배]] 전 의원을 시작으로 탈당 릴레이를 벌였다. 당시 열린우리당 내 보수파의 영수 격 인물이었던 [[김한길]]과 그를 따르는 초재선 의원들을 주축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하며 줄줄이 탈당해 [[중도개혁통합신당]], [[중도통합민주당]] 등을 창당하는 등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, 두차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[[정동영]] 전 장관과 의장을 지낸 [[문희상]], [[김근태]] 전 의장도 신당에 합류함으로서 기존 참여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했다. 하지만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[[대통합민주신당]]의 지지율은 결국 한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고,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,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여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[[고건]]마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여권에서는 박근혜/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을 만한 여력을 가진 뚜렷한 유력 대권 주자 없이 정동영(전 통일부장관), 손학규(전 경기도지사), 이해찬(전 국무총리)[* 정렬 순서는 지지율 순.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중도 사퇴.] 등이 최종 경선에 참여했고 지지율과 조직력 측면에서 앞서있던 정동영이 승리함에 따라 여권의 대권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. 제1[[야당]]인 '''[[한나라당]]'''은 [[이명박]]과 [[박근혜]]의 치열한 경선 끝에 '''이명박'''이 승리를 거머쥐어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. 한편, 한나라당에 있던 [[이회창]]은 [[제16대 대통령 선거]]에서 낙선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07년, 이를 번복하고 3번째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다. 특이하게도 이 대통령 선거는 양자 및 삼자대결도 아닌 '''6자 대결'''이었다. 보수, 진보 모두 모두 단일화 합의에도 실패하였고 후보들 각각이 독자 노선을 고집하였다. 현실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던지라 다음 해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하여 각자도생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. 이력도 다채로웠다. [[현대건설]] 회장과 [[서울특별시장]]을 지냈던 기호 2번 이명박과 [[MBC]] 기자, [[뉴스데스크]] 앵커를 지냈던 기호 1번 정동영 그리고 언론노조 출신으로 두 차례 대통령 선거 출마 경험이 있던 민주노동당 후보인 기호 3번 권영길, 그 외 [[유한킴벌리]] CEO 출신인 기호 6번 문국현과 [[경기도지사]],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기호 4번 [[이인제]], 여기에 [[대법관]], [[감사원장]], [[국무총리]] 등 대통령 빼고 다해본, 지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기호 12번 이회창이 뒤늦게 합류하였다. 결과적으로는 [[이명박]] 대 [[정동영]]의 대결이었다는 시각도 있다. 그러나 각자 충분한 의석과 지지율을 보유하여 유례없는 6자토론회가 된 셈. 아무리 요약해도 1강 2중의 3자대결이었다. 특히 기호 12번 [[이회창]]은 선거 2주 전까지 [[여론조사]]에서 2위였다. 실제로 선관위 주최 주요 후보 토론회에서도 6인 모두 참석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